조선의 학자 정시한 (1625~1707)
정시한은 인조 3년인 162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군이고, 호는 우담이다. 증조부는 대사헌 정윤복이며, 강원관찰사인 부친 정언황과 횡성 조 씨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26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강원도 원주 법천으로 낙향하여 평생 벼슬길을 몰리하고 오직 이현일, 이유장 등과 교류하며 학문에만 힘썼다. 특히 독학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원주에 은거하며 농사를 지어 자급하며 유일로 천거되어 사헌부집의, 성균관사업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현종 때에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고 한다.
1690년 <만언소>를 올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 '집안 다스리기를 엄격히 할 것, ''나라의 근본을 배양할 것', '조정을 바르게 할 것', '인재를 쓰고 버림에 신중히 할 것', '언로를 열 것' 등의 6조를 제시하였는데 이 내용에 분노한 임금이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 세자시강원진선으로 나아갔다.
1691년 서인을 몰아낸 남인 세력이 집권하는 권력 교체의 기사환국을 맞았을 때, 정시한은 남인에 속하여 인현왕후 폐위는 잘못된 일이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사직당하였다. 같은 해 다시 기용되기는 하였으나 사퇴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연왕후가 복위되고 서인이 집권하며 남인이 세력을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1696년 희빈 장 씨가 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당하게 되었다. 정시한은 이에 다시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속한 당파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신의 의리론적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정시한의 인품에 대한 언급은 <숙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정시한에 대하여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버리고 편안하게 고향에서 지냈다. 어버이를 섬겨 효도하였으며, 성품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워 남과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 가정은 가난하지 않았으나 검약을 법도로 삼았다. 모친이 천수를 다하고 나이도 이미 60인데 능히 상제대로 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칭송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저술서로는 가장 대표적인 문집인 <우담집>을 비롯하여 <임오록>, <만록>, <산중일기>, <관규록>, <사칠이 기 변>, <변무록> 등이 있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으로는 성리설의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이황의 입장을 명석하게 해명하고 도통을 계승한 데 있다. 따라서 이익도 정시한의 학문적인 공적을 평가하여 "학문의 정맥에 거슬러 올라가 이어감으로써 '사변칠증'을 저술하니 크게 빛나서 밝았다."라고 하였다. 정약용도 "정구, 장현광 이후로 진정하고 순수한 유학자는 오직 정시한 선생 한 분뿐이다, "라고 강조하였다.
정시한의 성리설은 '이'와 '기'의 관계를 현상적으로 주인과 보좌의 역할에 상응시켜 이주기보설에 의하여 이기사칠설을 전개한 것이 특징이다. 기를 이의 보조자로 규정하고 이를 주재하고 명령하는 자로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또한 정시한 선생은 이를 본원과 산수 양면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고, 이와 기의 관계에서도 홍륜과 분개의 두 형식을 동시에 인정함으로써 일원론이나 이원론으로 극단화하기를 거부하였으며, 현상적으로는 이이 선생이 <성학집요>에서 강조했듯이 이와 기가 혼융 무간함을 인정하지만 수양을 위해서는 이가 기를 조종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우담 정시한은 이황의 학설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사칠 변증>의 저술을 통하여 이이의 성리설을 41조에 걸쳐 조목별로 비판하며 퇴계학파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인물성상이론의 입장을 전개하며 1700년부터 3년 동안 이식과 인성과 물성의 동이문제에 관한 논변을 벌였다. 이는 기호학파인 한원진과 이간 사이의 인물성론인 호락노논쟁에 선행하는 것이다.
우담 정시한 선생의 문하에서 이식, 황수일, 이만부, 권두경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익은 정시한의 묘갈명을 지었고, 정약용은 방친유사에서 정시한의 학덕을 존숭하고 있다. 원주의 광암사에 배향되었다.
원주 도동서원
원주의 도동서원은 우담 정시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던 사원이다. 도동은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다. 이 도동서원의 복원사업이 2022년 5월 부론면 법천사지 북쪽에서 유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도동서원은 우담 정시한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숙종 37년(1711) 2월에 폐 법천사지에 광암사 도동서원 건립을 시작하여 숙종 47년(1721) 9월에 위판을 봉안하고 제례를 봉행한 이래 지방 교육 기관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해 오던 중 6.25 한국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법천사지 발굴조사로 인해 소실된 위치가 영구히 사라지게 됨에 따라 우담 정시한 선생의 문중에서 뜻을 모아 기존 터의 반대편인 도시랭이 마을 법천사지 북쪽 산 193번지 일원에 한식 목조 건물 7동을 짓기로 하였다. 이는 2,700제곱미터의 대지 위에 총 공사비 21억 5천600만 원을 들여 2023년 4월 준공을 목표로 나주정 씨 월헌공파 문중이 2022년 4월부터 사업을 시작하였고 현재 공사 중이다. 외삼문과 강당, 서재, 동재, 내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있다. 도동서원이 준공되면 우담 선생 선양 사업의 중심지가 되는 것은 물론이며, 원주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시민들의 전통 유교 문화교육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산중일기>
조선 후기 숙종대 우담 정시한이 62세의 나이에 1686년(숙종2년) 3월부터 1688년(숙종 14년) 9월까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의 명산 고찰 및 서원 등을 여행하며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유람기 이다. <우담선생문집> 19~20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1968년에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자료총서 제1집으로 영인 간행되었다. 2권 2책으로 된 필사본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산중일기의 1차 여행은 1686년 3월 13일에 원주 대야의 본가를 출발하여 이듬해 1월 23일까지의 기록으로, 속리산과 지리산, 덕유산 일대를 여행한 내용이다. 2차는 1687년(숙종 13년) 3월 8일부터 3월 17일까지로 치악산 일대를 여행하였다. 3차는 1687년 8우러 2일부터 10월 20일까지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였으며, 마지막인 4차는 1688년 4월 10일부터 9월 19일까지 경상도의 안동, 의성, 청송 등지의 서원 및 팔공산 일대를 여행하였다.
정시한은 3년에 걸쳐 네 차례의 여행 동안 전국의 명산 고찰을 유람하면서 매일매일 그날의 일과 자신의 감상을 기록하였다. 특히 총 300여 곳의 사찰에 들러 주위의 환경과 감상, 만난 승려들의 이름과 성품까지 상세하게 기록하여 조선 후기 사찰의 현황을 파악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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